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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6시

yyjhghgf 2024. 1. 28. 03:57


부드러운 삶에 이르는 먼 길 이재무는 시집 『저녁 6시』(창비, 2008)에서 부드러운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부드러운 삶은 “일직선의 각진 표정을”(「국수」)을 푸는 삶이다. 1980년대에 문단 생활을 시작한 그에게 세상은 각진 세상이었고, 각진 세상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그는 ‘날카로운 각’의 삶을 선택했다. 가슴 속에서 들끓는 더운 피가 시키는 대로 그는 끊임없이 달리고 달렸다. “한점 비명, 회한도 없이 장렬하게 전사할 거야”(「푸른 늑대를 찾아서」)라는 시적 다짐에 드러나는 대로, 그는 비장한 마음으로 날카롭게 각진 세상에 변화를 주려 했다. 1980년대를 올곧게 살아온 시인들이라면 외면할 수 없는 변혁의 꿈은 푸른 늑대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되어 타락한 세상을 비판하는 무기로 작용했던 셈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인은 나이를 먹었고, 이제 ‘지천명’의 나이에 이르렀다. 세상은 여전히 자본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관상용 대나무처럼 “자본의 데릴 사위가 되어 웃음 파는 / 쓸쓸한 선비의 초상”(「관상용 대나무」)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 시대의 ‘한물 간 심청이’는 지아비 대신 노래방에 나가 돈을 벌고 있고, 1980년대의 시적 무기였던 “가난은 이제 선하지도 힘이 세지도 않다”(「가난에 대하여」). 가난이 죄악이 되는 시대, 자본의 욕망이 공고하게다져진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의 내면에 변혁의 꿈은 아직도 남아 있을까? 이재무는 욕망을 말하고 있다. 욕망은 “아직도 보내지 못한 애증과 집착”(「쓴다」)이기도 하고, “회로 잃은 온갖 시뻘건 감각들이” 펼쳐내는 “구멍의 식욕”(「대속」)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몸은 늙어가는데 마음은 이러한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젊은 시절의 욕망에 머물러 있다. “나이를 따로 먹은 몸과 마음의 틈바구니”(「청승」)에서 “몸속 귀때기 파란 청년은 또 울먹이”(같은 시)이고 있다. 파란 청년의 욕망은 이루지 못한 시대적 열망을 의미할 것이다. 열망은 남아 있지만, 그 열망을 이룰 수 있는 몸은 이미 늙어가고 있다. 욕망과 열망의 경계는 현실(몸)과 이상(마음)의 거리만큼이나 멀게 느껴진다. 저녁이 오면 도시는 냄새의 감옥이 된다 인사동이나 청진동, 충무로, 신림동, 청량리, 영등포 역전이나 신촌 뒷골목 저녁의 통로를 걸어가보라 떼지어 몰려오고 떼지어 몰려가는 냄새의 폭주족 그들의 성정 역시 몹시 사나워서 날선 입과 손톱으로 행인의 얼굴 할퀴고 공복을 차고 목덜미 물었다 뱉는다 냄새는 홀로 있을 때 은근하여 향기도 맛도 그윽해지는 것을, 냄새가 냄새를 만나 집단으로 몰려다니다 보면 때로 치명적인 독 저녁 6시, 나는 마비된 감각으로 냄새의 숲 사이 비틀비틀 걸어간다 - 「저녁 6시」 전문 저녁 6시는 도시인들의 욕망이 해방되는 시간이다. 해방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집단으로 몰려다니는 냄새(감각)에 의해 강제적으로 해방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냄새의 감옥’으로 돌변하는 도시의 저녁은 때로는 치명적인 독이 되어 도시인들의 감각을 마비시킨다. 욕망(식욕)이 그렇지 않은가. 냄새는 사람들을 자극하고, 그 자극을 못 이기는 사람들은 욕망의 세계로 들어간다. ‘비틀비틀’이란 시어에 표현되는 대로, 욕망은 사람을 어떻게든 ‘냄새의 숲’으로 끌어들인다. 저녁 6시에 펼쳐지는 냄새의 제국은 자본이 음험하게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는 시간에 만들어진다. 낮이 밤으로 변하는 시간, 이성이 꿈틀거리는 욕망에 유혹당하는 시간에 사람들은 비틀거리는 몸짓으로 냄새의 제국 속으로 흡수되는 것이다. 시인의 표현대로라면, 도시인들은 제도의 줄에 얽매여 억지울음을 우는 “울음이 없는 개”(「울음이 없는 개」)들일 것이다. 푸른 늑대의 더운 피는 더 이상 열망이 아니라 욕망에 불과할 뿐이다. 자본에 길들여진 개들은 제도가 부여하는 삶의 즐거움에 빠져 욕망 너머의 세계에는 관심이 없다. 날카로운 각을 세우고 “꿈속에서도 서류 꾸미고 결제란에 사인을”(「날카로운 각」) 하는, “한 방향만을 고집하는 / 저 낯익은 사내”(「팽이」)처럼 사람들은 자본의 회초리에 맞으면 맞을수록 자본이 추구하는 삶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든다. 팽이의 몸에 척척 감기는 회초리의 속도에 따라 “맹렬한 속도로 돌고 도는 관성은”(「팽이」) 저 낯익은 사내로 표현되는 자본주의적 인간의 서글픈 현실을 대변한다고 하겠다. 자본주의가 변할 수 없는 삶의 현실이 되고 있는 지금 이곳에서 시인은 “내가 내게로 돌아가는” 길,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는 가장 먼 길을 “분홍빛 설렘과 푸른 두려움으로”(「먼 길」) 걸어가려 하고 있다. 지천명의 나이가 되어 걷는 길은 각진 길이 아니라 부드러운 길이다. “부드러운 복수”라는 말에 드러나는 바, 시인은 “목청 높여 과장되게 고함치고 울어왔”던 날카로운 복수의 신념에서 벗어나 “시는 삶에 대한 부드러운 복수”(「부드러운 복수」)라는 인식에 이르고 있다. 부드러운 복수의 길은 세월(시간)의 힘을 인정하는 길이다. 늙지 않고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생명은 없다. 중요한 것은 젊은
1983년 으로 등단하여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 이재무 시인의 신작 시집.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현실과 이상, 신념과 감각, 일상과 예술을 절묘하게 결합하여 그늘과 생명의 예술적 응전을 추구하고 있다. 80년대식의 강고한 현실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생활세계와 심미적 감각을 아우르면서 인간적 진정성이 묻어나는 독특한 언어의 세계를 구축한 시인의 시세계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작품집이다.

제1부
국수
갈퀴
두꺼운 공책
깊은 눈
웃음의 시간을 엿보다
철없는 맨날
해산
감자알
푸른 늑대를 찾아서
좋겠다, 마량에 가면
얼음꽃
해돋이
운문사
쓴다
청명
보리밭
봄을 달래다
물수제비
저녁ㅇ이 온다

강진만 갯벌

제2부
전문가
부조함
대속
권총
여름날 틀키다
봄밤
신발을 잃다
어린 새의 죽음

넘어진 의자
우물
청승
아버지 너머는 없다
빈 자리가 가렵다
소리에 업히다
종소리
하루

제3부
부재에 대하여
저녁 6시
울음이 없는 개
말과 권력
공중전화
식물성 곱창
가을
심청전
몸살
그녀의 울음은 함정
날카로운 각
팽이
관상용 대나무
가난에 대하여
부드러운 복수

제4부
돌 속의 물
겨울숲에서

세월
백련사 동백꽃
황홀한 재앙
바다의 시인들
무덤에 대하여
양수리
사리암을 찾아서
바람
낙양에 와서
슬픔은 늙지 않는다
술픔은 늙지 않는다
노인들의 장기관
물속의 돌
먼 길
젊은 꽃

해설│이형권
시인의 말